아킬레우스의 노래
💬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되는데 사실 <키르케>만큼 재미있진 않았다. 익히 아는 일리아드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. 근데 나 일리아드 왜 읽었지? 교양 수업 같은 거에서 억지로 읽었겠지 아마.
<키르케>를 읽고는 이 작가의 재능이 빈틈을 채워넣고 서사를 전환하는 상상력이라고 생각했다면, 여기서는 정해진 이야기 안에서 디테일을 합리적으로 조립하는 능력이 훨씬 더 돋보였다(예를 들면 오디세우스가 여장한 아킬레우스를 찾아내는 장면. 보통 알려진 썰로는 방물장수인 척 물건을 늘어놓아 칼에 관심을 보이는 여자애를 보고 너구나 했다는데 아니 숨으려고 여장한 사람이 왜 멍청하게 티내겠냐고, 같은 것들을 잘 발라서 살짝 바꿔서 잘 붙여 놓음). 뭐 둘 다 할 수 있는 작가라니 멋진 것이다.
그리고 정해진 이야기라는 것이 참 중요하지. 그닥 관심 있는 장르는 아니라 그리스 신화 관련 무엇이든 최근에는 거의 본 적이 없는데,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도 아 세상에 이렇게 지독히 운명론적인 관점이란 게 있었지, 하고 말았다. 한 치 앞을 못 보는 전쟁터에서 활을 아무렇게나 겨눠도 내 신이 봐주면 딱 그때 죽기로 예견되어 있었던 적편 영웅의 심장에 그대로 내리꽂는답니다. 농담이 아니라 파리스가 아킬레우스 쏘기 전에 어디 조준할까요? 하니까 아폴론이 뭘 조준하냐 쏘면 죽는다 걍 쏴라 하는 장면이 있어서 진짜 웃김. 원래 활은 조준을 해야 하는 건데요 그럴 거면 가서 죽여주지 뭐하러 나보고 쏘라고 해?
이런 식의 태도는 필연적으로 허무가 되는 것 아닌가, 허무와 낭만은 한끗차이인가, 그리고 아무래도 <키르케>에서 가능했던 전복과 탈주는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라 그런가, 하는 생각도.